2022년 2월 24일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이 특별군사작전 개시명령을 선언하면서 러시아군의 우크라이나 공격이 시작되었는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지정학적 갈등 원인을 알아보겠습니다.
《함께 보면 좋은 글》
1. 동부유럽 지역의 지정학적 특징
유럽 중앙부에 위치한 동부유럽은 주로 슬라브계 국가들이 분포하고 있습니다. 이 지역의 국가들은 과거 소련 붕괴 전에 대부분 소비에트 연방국가였으며 오랜 시간 소련의 영향을 받은 지역입니다.
가. 지리적 위치
동부유럽지역은 유럽 대륙 중앙부에 위치하고 있고 북쪽으로는 핀란드만이 있으며 동쪽으로 우랄산맥과 아시아 대륙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남쪽으로 지중해와 아드리아해, 서쪽으로 중앙유럽 지역과 연결됩니다.
나. 역사적 특징
이 지역 국가들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고 중세시대에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들을 형성했고 19세기와 20세기부터 대부분의 국가들이 소련의 영향 아래 들어가게 됩니다.
다. 다양한 문화적 특징
동부 유럽은 다양한 문화적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이 지역은 슬라브계 국가들이 많고 각각 고유한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유대인, 로마 카톨릭, 프로테스탄트, 이슬람 등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고 있는 지역입니다.
2.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근현대사적 관계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러시아의 일방적 공격에 국제적 비난이 있었지만 양국의 역사적 관계를 알아보면 충분히 발생가능한 상황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양국의 근현대사적 관계를 레닌 시대부터 알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블라드미르 레닌은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내세워서 소련에 속한 우크라이나 자치권을 허용해주었고 우크라이나 옆 동남쪽 일부를 우크라이나에 편입시켜주었습니다.
레닌 사망 후에도 레닌의 사상 그대로 토착화 정책을 시행했고 1920년대 후반 우크라이나 내 정부 직원과 공산당원의 과반수를 우크라이나인으로 채우기도 했습니다.
우크라이나에서 우크라이나어 사용도 장려했으나 중앙정부 진출을 위해서 공용어인 러시아를 사용해야 하는 정도였으며 자율성도 최대한 키워주기도 했습니다.
레닌 다음으로 권력을 잡은 이오시프 스탈린은 우크라이나의 자율성을 확 줄이고 우크라이나를 소련 산업의 핵심 지역으로 육성할 계획이 있었으며 제1차 5개년 계획(1928~1932)을 통해 농업 집단화와 강력한 공업화 정책을 시행했고 소련 전체 1400개 공장 중 400여 개를 우크라이나에 지었습니다.
우크라이나 드니프로강에는 유럽 최대 규모 수력발전소를 건설했고 소련 최고의 공업도시로 만들고자 했으며 우크라이나 동부를 소련 공업지역으로 지정한 후 러시아인 200만 명을 이주시키기도 했습니다.
돈바스 지역의 인구 30%가 러시아인이며 친러 성향이 강하게 나타나는 것도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991년 소련이 붕괴되면서 독립을 맞은 우크라이나는 국가 운영 경험이 부족했고 부정부패로 쇄락의 길을 걷게 되면서 국민들의 불만은 커졌으며 특히 돈바스 지역에서의 불만이 컸는데 친러 세력을 중심으로 러시아의 무기와 경제적 지원을 통해 러시아 보호 아래 내전을 일으켜서 독립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정부는 같은 국가인데 독립을 요구하는 것은 인정할 수 없었고 정부군을 돈바스 지역에 투입하여 무력으로 제압하려 하면서 8년 이상 내전상태가 유지되었습니다.
돈바스 내전은 돈바스 지역에서 2014년 4월에 발발한 친러 성향의 반군과 우크라이나 정부군 사이의 마찰로 시작되었으며 우크라이나 정부로부터 독립을 요구하는 친러 성향의 반군은 시청과 정부청사를 점거 후 민병대를 조직해서 정부군과 대치했던 것입니다.
러시아는 돈바스 지역을 크림반도 병합과 유사한 형태로 진행하려고 했으나 2015년 독일, 러시아, 프랑스, 우크라이나 등 4개국 정상이 모여서 민스크 협정을 체결했고 돈바스 지역의 군사분쟁을 끝내고 자치권을 확대해 주는데 합의를 했습니다.
그러나 자치권에 대한 구체적인 조항이 없어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친러 반군의 충돌이 지속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돈바스 지역에서의 갈등이 최고조에 이른 것은 2019년 러시아가 돈바스 지역 주민 80만여명에게 러시아 여권을 발급해준 사건이었으며 이후 2022년 2월 22일 러시아는 돈바스 지역에 세운 2개의 자치국가를 승인했고 돈바스지역 분리에 동의했으며, 러시아의 승인하에 두 개의 '자칭' 자치국가인 도네츠크 인민공화국과 루한스크 인민공화국이 탄생했습니다.
러시아는 2022년 2월 24일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신생 자치국 간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특별 군사작전을 개시한다고 명분을 내세웠고 우크라이나는 크림반도를 러시아에 빼앗긴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무력 대응을 하면서 현재까지 양국 간 전쟁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3. 미국과 나토의 국제조약 미이행에 대한 러시아의 불신 확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이후 1990년 소련은 미국과의 조약에서 나토가 더 이상 동쪽으로 가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나 나토
는 계속해서 동진을 했고 푸틴이 이것에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그러나 나토의 반박은 베를린 장벽을 기준으로 전 국가를 상대로 한 동진 금지는 러시아의 해석일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러시아의 의견은 묵살되었으며 유럽 대다수 국가가 도미노식으로 나토에 가입했으며 우크라이나가 마지막 완충지대 역할을 했는데 우크라이나 마져 나토에 가입하면 러시아 입장에선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2022년 2월 7일 러시아-프랑스 간 모스크바 회담 후 공동 기자회견에서 푸틴은 만약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가입하거나 우크라이나와 나토가 군사적 수단을 동원해서 크림반도를 되찾으려는 시도를 한다면 자동으로 유럽국가들은 러시아와의 전쟁과 충돌에 휘말리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우크라이나 침공을 암시하기도 했습니다.
4. 러시아는 왜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에 민감한가?
EU는 1993년 설립된 유럽의 정치 경제의 공동체이고 서로간 경제협력과 평화유지를 추구는 조직이며, 나토는 군사동맹으로 서유럽국가들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군사동맹으로 나토 헌장 5조에 한 회원국이 공격받으면 다른 회원국 전체가 공동방어에 나선다는 규정이 있어 러시아와 나토 회원국 간 마찰 발생 시 러시아 입장에서는 부담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추진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마지노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5. 소비에트연방공화국에서 독립 후 우크라이나 정치 상황
1991년 소비에트연방공화국에서 독립한 우크라이나는 독립 당시만 하더라도 우크라이나는 유럽에서 두 번째로 큰 영토를 갖고 있고, 농사에 유리한 토양이며, 소련 시절 군수산업의 발달로 세계 5위의 군사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독립 당시 핵무기의 상당수가 우크라이나에 집중 배치됐기 때문에 우크라이나의 핵무기 보유량은 핵미사일 176기, 핵탄두 1800여기나 됐으며 독립 후 세계 핵무기 보유량 3위 국가였습니다.
그러나 소련의 계획 경제 체제 아래서 독립적인 경제활동을 한 경험이 전무했던 우크라이나는 경제제도와 관리체계가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독립하게 됨에 따라 혼란이 계속되었고 1993년 인플레이션이 1만 퍼센트를 넘었으며 1994년 GDP 성장률은 35% 이상 하락 헸고 관료의 부정부패, 주요 기업도 소수 경제인들이 독식하면서 유럽에서 최빈국으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운 경제상황을 극복할 대안을 모색하다가 본인들이 보유 중인 핵무기를 관리하기도 어렵고 비용도 많이 발생하여 핵무기를 필요로 하는 국가에 팔아서 경제회복을 위해 쓰겠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미국과 러시아가 이러한 동향을 확보하여 핵무기 매매에 제동을 걸었고 결국 1994년 우크라이나는 핵폐기를 조건으로 경제지원을 받는 헝가리 부다페스트 양해각서를 체결하게 됩니다.
※ 부다페스트 양해각서에는 우크라이나가 핵확산 금지조약(NPT)에 가입하고 핵무기를 제거한다면 ① 미국과 러시아, 영국은 우크라이나의 독립, 주권, 국경선을 존중하고 ②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력사용을 자재하며 ③ 우크라이나에 핵공격을 하지 않고 ④ 상황이 변하면 위 내용을 다시 협의한다.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우크라이나는 부다페스트 양해각서 체결에 따라 핵 폐기 비용 전액을 보상받았고 핵무기당 100만 달러의 보상과 미국으로부터 2억 달러의 경제지원을 약속받았습니다.
당시 우크라이나는 핵무기 폐기를 결정하고 나토 가입을 서둘러서 하려고 했으나 새로운 갈등이 발생했고 동부와 서부로 나뉘어서 친러세력과 친서방 세력이 극명하게 분리되어 마찰이 시작되었습니다.
1994년 대통령으로 당선된 우크라이나의 쿠치마 대통령은 친러성향이 강했는데 2000년 푸틴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양국은 밀접한 관계를 형성했습니다.
2004년 친서방 성향의 유센코와 친러시아 성향의 후보 야누코비치가 경쟁을 했는데 친서방 성향의 유센코가 당선되면서 EU와 나토 가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으나 러시아의 경제적 압박으로 제동이 걸리게 됩니다.
2010년엔 디시 친러 성향의 야누코비치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EU는 우크라이나가 EU에 가입하면 강력한 구조조정 및 경제긴축 조건으로 14억 달러지원을 약속했으나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EU 가입을 포기하면 조건 없이 150달러 지원과 천연가스 공급가를 인하해 줄 것을 약속함에 따라 EU 가입을 포기합니다.
그러나 유럽연합 가입을 기대했던 군인들과 친서방 성향의 국민들은 대규모 시위를 일으켰고 시위자는 100만 명이 넘었으며 100일 이상 지속되면서 정부가 무력으로 진압을 시도했으나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자리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이후 친서방 성향의 대통령들이 당선되면서 다시 EU 및 나토 가입을 추진함에 따라 러시아와의 마찰이 다시 불거졌고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발생하는 단초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6. 우크라이나 영토에 대한 러시아의 입장
레닌, 스탈린, 후르쇼프 등 3명의 러시아 지도자는 폴란드, 헝가리, 루마니아에 속한 땅의 일부를 우크라이나에 붙여줬으며, 1954년 후르쇼프는 크림반도를 우크라이나에 넘겨주면서 우크라이나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만들어진 과정이었습니다.
러시아의 지도자들이 우크라이나에 땅을 준 것은 우크라이나가 근처에 있고 행정 편의상 관리가 용이해서였으며 소비에트연방이라는 하나의 체제로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면서 에스토이나 등 15개 공화국이 독립을 했으나 과거 소련 지도자들이 우크라이나에 넘겨주었던 영토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정리하지 않아 마찰의 불씨가 되었고 러시아는 크림반도를 포함하여 우크라이나의 다수 지역이 러시아의 영토라는 입장이라 양국 간 마찰은 지속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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