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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상식 및 사회문제

싱가포르의 역사-독립 당한 싱가포르

by 이슈 분석 2024. 5. 9.

싱가포르의 역사

국가경쟁력 세계 1위, 국가 청렴도 아시아 1위 등 수많은 타이틀을 갖고 있는 작지만 강한 국가 싱가포르는 부산보다 약간 작은 크기의 면적 국가이며 인구는 약 570만 명 정도이고 무역과 금융, 관광산업으로 빠르게 성장하면서 아시아의 4마리 용중 하나로 꼽히는데요 싱가포르의 역사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싱가포르의 지정학적 위치

싱가포르는 동남아시아에 위치한 섬나라로, 적도 기후에 영향을 받고 있는 국가입니다. 싱가포르의 지리적 위치는 인도양과 태평양 사이의 해상 교차로에 있으며 말레이 반도와 스리랑카의 중간에 있습니다.

싱가포르의 지정학적 위치
싱가포르의 지정학적 위치

좁은 수초 해협으로 인해 말레이 반도와 분리되어 있으며 인도네시아의 섬들과는 동쪽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지리적 위치는 싱가포르를 아세안의 중심지로 만들었고 지역 경제와 정치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싱가포르는 중요한 해상 교차로에 있어서 세계적인 해운 및 무역의 중심지로 발전했고 세계에서 가장 바쁜 항구로 자리 잡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싱가포르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인접한 국가들의 경계를 형성하고 있는 수초 해협으로 동아시아와 남아시아 간의 교역이 이루어지는 핵심적인 해상 경로입니다. 이러한 지리적 장점은 싱가포르가 국제무역과 해운의 중심지로 발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싱가포르는 중요한 국제회의나 협력이 이루어지는 중심지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주변국가들과의 경제적, 정치적 관계에도 싱가포르의 지리적 위치가 중요한 작용을 했다고 할 수 있고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주요한 국제적 중심지 중 하나로 자리매김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싱가포르의 역사

"싱가포르"라는 국명의 유래는 14세기 말레이시아 팔렘방 지역을 다스리고 있던 "상닐라 우타마"라는 왕자가 조그만 외딴섬을 발견했는데 우타마가 이 섬에서 본 것이 사자 모양의 동물이라고 전해지며 이 사자 모양의 동물을 보고 싱가푸라(Simgha 사자+Pura 도시)라고 부르기 시작하여 지금의 싱가포르가 되었다고 합니다. 

싱가포르는 강력한 "믈라카 술탄국"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었고 당시 믈라카 술탄국은 말레이 반도 전체와 자바섬 7개를 아우르는 국가였으며 명나라와 대대적인 교류를 할 만큼 무역의 중심지로 발전했습니다. 

지리적으로도 해상 향신료 루투의 주요 거점에 속해 동남아 및 동아시아로 가는 관문 역할을 했고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이기 때문에 훗날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영국 등이 차례로 믈라카 술탄국을 놓고 전쟁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포르투갈 점령기

16세기 들어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바다에서의 우위를 점하는 절대 왕정국가로 떠오르기 시작했으며 포르투갈이 동남아시아까지 진출하여 믈라카 지역을 호시탐탐 노렸습니다. 

포르투갈은 이곳에서 경제권을 확장하고 기독교를 전파하고 싶었고 결국 1511년 불과 700명의 군인들로 2만 명이 지키는 믈라카를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당시 포르투갈군 전사자는 28명 밖에 되지 않았으며 믈라카 술탄국은 포르투갈의 속국이 되면서 식민지의 아픈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포르투갈이 믈라카 술탄국을 점령하자 믈라카 술탄국의 후예들은 포르투갈을 피해 남쪽의 조호르 술탄국으로 이동하기 시작했고 이후 조호르 술탄국과 포르투갈은 믈라카를 놓고 30년 동안 전쟁을 벌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싱가포르 대부분 지역은 불에 탔으며 많은 기록들이 사라지고 많은 사람들이 떠나면서 잊혀 가기 시작했습니다. 

네덜란드 점령기

17세기에 들어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동남아시아에서 막대한 이익을 거머쥐자 네덜란드가 후발주자로 동남아시아에 진출하기 시작했고 네덜란드 역시 향신료의 주요 루트인 믈라카 지역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포르투갈과 30년 이상 전쟁을 하면서 포르투갈에 복수심을 품고 있던 조호르 술탄국은 강력한 포르투갈을 쫓아내기 위해서는 외세의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결국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네덜란드와 동맹을 맺었으며 포르투갈을 믈라카 지역에서 몰아내면 네덜란드가 믈라카 지역을 양도받는 것에 합의했습니다. 

네덜란드는 자신이 원하는 지역을 쉽게 얻기 위해서는 조호르 술탄국의 제안이 나쁠 게 없다는 입장이었고 1641년 결국 아시아 최강급 방어력을 자랑하며 수많은 세력을 막아냈던 포르투갈은 조호르-네덜란드 동맹군에 의해 축축되었습니다.

이후 네덜란드는 믈라카를 제외한 모든 영토를 조호르 술탄국에 반환했고 믈라카를 수중에 넣을 수 있었으며 말레이 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영국 점령기

영국도 전 세계적으로 식민지 확장정책을 펴기 시작했으며 영국 또한 싱가포르와 말레이반도의 잠재적 가치를 인식하고 이곳을 무역의 중심지로 개발하고 싶어 했습니다. 

이러한 영국의 의도를 도와주기라도 하듯 유럽 본토에서 나폴레옹이 네덜란드를 점령하면서 동남아시아 지역에서의 네덜란드의 영향력은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영국은 이 기회를 틈타서 싱가포르와 협상을 시도하는데 막대한 돈을 주고 왕가의 신변도 보호해 주는 조건으로 불타버린 버려진 땅, 싱가포르를 넘기라는 제안을 했고 조그만 어촌 싱가포르는 영국의 식민지 일부가 되었으며 모든 교역은 이곳을 중심으로 이뤄지기 시작했고 떠오르는 무역항이 되었습니다. 

영국이 지배하면서 싱가포르는 주변국으로부터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인구도 점점 증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 싱가포르는 말레이인, 인도인, 파키스탄인, 중국인 등 다양한 인종이 뒤섞인 국가가 된 것입니다. 

 

일본 점령기

2차 세계대전과 태평양 전쟁이 발생하면서 일본제국은 동아시아 침략을 정당화하려는 "대동아 공영권"이라는 슬로건을 내걸도 싱가포르에도 침공을 했습니다.

당시 영국은 수많은 식민지를 관리할 비용도 부족했고 여력도 없다 보니 손쉽게 일본에게 싱가포르를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1942년 2월부터 일본군은 싱가포르에 거주 중인 중국인 화교에 대한 "숙칭 대학살"을 자행했고 2만 5천 명에서 5만 명 정도의 중국인 화교를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숙칭"은 "일본인의 중국인 숙청"을 뜻하는 한자입니다. 

싱가포르 독립기

1945년 8월 일본 제국이 패망하면서 2차 세계대전은 종료되었고 일본의 식민지 대부분은 풀려났으며 말레이 반도와 싱가포르는 다시 영국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일본 침공 시 영국이 싱가포르를 제대로 방어하지 못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기에 싱가포르인들에게 절대적 통치자로서의 영국의 신화는 깨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싱가포르는 점점 혼란으로 시끄러웠으며 영국 식민정보를 불신하는 주민들 사이에서 좌우 이념 갈등이 고도되었고 각지에서 독립요구가 확산되었습니다. 

영국 또한 수년간의 전쟁으로 더 이상 식민지를 유지할 여유도 없었기에 1957년 말레이 연방을 독립시켰고 1963년 영국령 싱가포르도 독립시켰습니다. 

싱가포르는 영국으로부터 독립 후 리콴유 총리를 중심으로 말레이 연방에 가입해서 이들에 의존하려고 했는데 많은 부분에서 양측의 의견이 맞지 않았습니다. 

당시 말레이 반도에서는 중국인이나 인도인 등 소수 민족을 차별하는 정책을 강하게 시행하고 있어 다민족, 다인종으로 구성된 싱가포르와의 통합은 큰 걸림돌이었습니다. 

또한 말레이 반도 지역에서는 경제력이 강했단 싱가포르가 훗날 말레이 연방을 집어삼킬 수도 있다는 의견마저 나오면서 싱가포르에 대한 배척은 점점 커졌고 결국 싱가포르는 말에이시아에서 탈퇴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싱가포르가 말레이 연방에서 탈퇴되는데 말레이인과 화교도들의 갈등도 한몫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64년 7월 21일 싱가포르 내에 있던 말레이인 중심의 무슬림 행사인 무함마드 탄신 기념행사가 있었는데 이 행사를 기점으로 화교와 말레이인 화교들과 11일 동안 유혈 충돌 사태가 발생했고 싱가포르 정부는 싱가포르 전역에 밤에 통금을 발령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으며 36명이 사망하고 556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습니다. 

그해 9월에도 폭동이 일어나 13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등 계속해서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리콴유 총리는 말레이시아 정부에 강력한 연방국가는 아니더라도 느슨한 관계라도 완전히 독립국으로 싱가포르를 놔두지 말 것을 요청하기도 했으며 미국과 영국, 호주 등 서방 진영에서도 소련과 중국의 동남아 공산화 정책에 대응해서 말레이시가가 싱가포르와의 연방국가를 유지해야 한다는 압력을 넣었지만 말레이시아 정치권은 싱가포르가 들어줄 수 없는 내용만 요구한다고 판단하여 받아주지 않았으며 결국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로부터 독립을 당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싱가포르 발전기

1965년 독립당시 싱가포르의 1인당 GDP는 겨우 400달러 정도였을 정도로 적었고 물도 부족했으며 무엇보다 정치권의 부정부패가 너무도 심각한 수준이었습니다. 

싱가포르는 원치 않는 독립을 강제로 당하게 된 것이고 1965년 8월 9일 말레이시아에서 퇴출됨에 따라 리콴유 총리는 싱가포르의 미래에 대해서 매우 막막하게 생각했습니다. 

리콴유 총리가 기자회견을 하면서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을 흘려서 연설을 20분간 중단하는 사태가 발생할 정도였으니 당시에 싱가포르가 독립을 강제적으로 당하고 어떤 상황이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인 것 같습니다. 

작은 국가로 말레이 연방에 남는 것이 생존에 더 유리한 길이지만 강제로 독립이 된 상황에서 스스로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 했던 것입니다. 

초기 싱가포르는 예상대로 혼란 그 자체였으며 580만 명이 살고 있는 이 작은 나라는 지정학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수동적이고 저자세를 취하지 않았으며 리콴유가 장기 집권하는 동안 청렴한 정부와 국민을 부유하게 하기 위해 수많은 정책을 펼쳤으며 자본주의 체제를 고수하면서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적절히 섞어 최대한의 효율을 끌어올렸습니다. 

현재의 싱가포르는 리콴유로 시작해서 리콴유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의 독재정치가 싱가포르 발전의 중심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리콴유는 1959년부터 1990년까지 거의 30여 년 총리를 했고 1990년부터 2004년까지 고독총이라는 총리를 앉혔지만 리콴유가 수석장관직을 만들어서 실권을 행사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이 기간도 리콴유의 통치권 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004년에 리콴유의 아들인 리센륭이 총리에 취임했고 2024년 현재까지 총리직을 수행하고 있으며 싱가포르 독립기부터 성장기는 물론 지금에 이르기까지 리콴유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싱가포르 내 리콴유의 영향력은 엄청난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22년 기준 싱가포르의 1인당 GDP는 72,000달러 수준으로 한국보다 2배 이상 높으며 경제성이나 정부효율성 등을 포함한 국가경쟁력 지수가 세계 3위 수준이고 한국은 27위 인 것을 고려하면 얼마나 눈부신 발전을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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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초대 총리 리콴유에 대한 평가는 공산주의를 막았지만 민주주의를 파괴한 인물로도 평가를 받는 등 국제사회의 평가는 매우 갈리지만 싱가포르 발전의 중심에 있었고 싱가포르가 독립 국가로 자리 잡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인물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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