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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정세 및 분쟁

불행한 역사의 반복 미얀마의 민주화는 진행형

by 이슈 분석 2023. 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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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미얀마에서는 군사 쿠데타로 수만 명의 시민들이 희생되었고 100만 명이 넘는 난민이 발생했지만 국제사회의 무관심 속에서 피해는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불행한 역사가 반복되고 있는 미얀마에서 무슨 일이 발생하고 있고 민주화를 향한 국민들의 외침을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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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의 지정학적 특징

미얀마는 버마족이 전체 인구의 70%을 차지하다 보니 국가명을 버마라고도 불렸으며 국토의 크기의 남한의 약 6.7배 정도 크며 인구는 5,470만 명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미얀마는 중국과 인도 등의 강대국은 물론 태국과 방글라데시 등 국가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서쪽지역은 인도양과 접하고 있어 역사적으로 많은 국가들이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미얀마를 차지하려 했습니다. 

미얀마 지도-소수민족 구역
미얀마지도-소수민족구역

미얀마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는 영국 식민통치 시절 소수민족을 고려하지 않고 국경을 설정하다 보니 160여 개의 부족들이 한 국가에서 생활해야 하는 모습이 되었습니다. 

미얀마 내 공용어는 미얀마어지만 소수민족별로 사용하는 언어가 다른데 총 242개의 언어가 사용되고 있다고 하니 미얀마 내에서 조차도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물론 전체 인구의 70%인 버마족이 다수를 차지하지만 나머지 30%는 소수민족으로 상시 마찰의 불씨로 작용되어 왔습니다.

소수민족 중에서 산족이 9%, 카렌족이 7%로 다수를 차지하고 있고 기타 소수민족이 14% 분포하고 있는 등 세계에서 가장 많은 민족으로 구성된 국가로 소수민족 문제가 국가 불안의 가장 큰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미얀마는 2012년 이후 매년 7% 이상의 경제성장률을 보였는데 경제성장의 배경에는 풍부한 천연자원이 있었습니다. 미얀마는 천연자원의 보고라고 할 정도로 천연가스를 포함하여 석유, 고급원목인 티크목, 루비와 사파이어 등이 세계적인 원산지이며 유연탄, 우라늄, 구리, 철, 니켈, 아연 등도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습니다. 

 

미얀마의 소수민족 역사

영국의 미얀마 식민통치가 시작된 1886년 이전에는 버마족이 세운 꼰바웅 왕조모든 소수민족들이 조공을 바치는 관계로 비교적 종족 간 충돌 없이 안정적으로 관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영국의 식민통치가 시작되면서 영국은 소수민족의 영토를 고려하지 않고 국경선을 임의대로 그었으며 버마민족과 소수민족을 하나로 통합하면서 식민지배를 시작했습니다. 

또한 소수민족들끼리 힘을 합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갈등을 부추겼으며 이를 위해 다수의 버마족들은 무시하고 소수민족만을 군인과 중간 관리자로 등용했습니다. 

영국은 미얀마의 다양한 소수민족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민족 간 갈등을 이용했을 뿐만 아니라 일부 소수민족은 기독교화시키면서 종교갈등까지도 만들었습니다. 

영국은 인도 계열의 사람들을 대거 미얀마로 이주시켜 전체 인구의 7% 수준까지 확대했으며 이들에게 경제권을 주었으며 이들은 힌두교가 아닌 이슬람교를 믿는 로힝야족이었습니다. 

영국은 로힝야족에게 버마족은 물론 다른 소수민족의 땅을 빼앗아서 로힝야족에게 나누어 줬고 영국 식민통치기간 동안 이들은 막강한 부와 권력을 누렸습니다.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버마민족은 영국 식민통치기간 동안 소수민족들에게 통제를 받아야 했고 다른 국가에서 이주한 민족들에게 경제권을 모두 빼앗기는 아픔을 겪었으며 이들의 정신 속에는 로힝야족이 자신들의 조상을 괴롭힌 민족으로 강하게 자리 잡는 결과를 가져왔고 훗날 로힝야족 대학살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국은 2차 세계대전 후 미얀마 내 소수민족에 대한 독립을 약속함에 따라 소수민족들은 미얀마 자체 독립을 반대해서 영국의 편에 서기도 했습니다. 미얀마 전체의 독립을 이루려던 아웅산은 소수민족의 협조 없이는 영국을 몰아낼 수 없었고 독립을 하더라도 이들을 품지 않으면 평화도 보장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웅산은 각 부족의 자치권을 대폭 인정하는 '팡롱협정'을 맺으면서 소수민족의 협력을 얻어낼 수 있었으며 팡롱협정에는 10년 뒤 소수 부족의 독립여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약속했는데 절대다수의 버마족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56년간 영국 식민통치를 받는 동안 버마족은 홀대를 받았고 소수민족과의 감정의 골은 깊어질 때로 깊어져 있었는데 아웅산이 주도해서 '팡롱협정'을 체결한 것에 대해서 반대하는 세력들이 많았는데 결국 아웅산은 그러한 세력에 의해 암살을 당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아웅산이 사망한 후 군부가 무력으로 권력을 잡으면서 팡롱협정은 흐지부지 되었고 민족간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미얀마의 군사쿠데타 역사

미얀마의 군사쿠데타는 아웅산 사망 후 팡롱협정이 흐지부지되고 영국이 떠난 후 미얀마는 소수민족 간 내전이 수시로 발생하면서 국가 전체적으로 혼란스러웠으며 이러한 혼란을 통제한다는 명목하에 네윈이라는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면서 군사쿠데타의 역사는 시작했습니다. 

네윈이 정권을 잡은 후 민족 간 감정은 격화되면서 내전이 발생했으며 영국이 떠난 미얀마는 잔인한 전쟁터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영국식민통치기간 동안 권력과 부를 갖고 다수의 버마족을 괴롭혔던 로힝야족에 대한 학살과 강간이 일어났고 인권유린, 인신매매가 발생하면서 대량 난민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소수민족들은 한 때 미얀마 영토의 2/3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승승장구했는데 버마족의 독립군을 모태로 하는 미얀마 군부가 이들을 몰아내면서 미얀마 군부는 미얀마를 구한 것에 대한 국민적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미얀마 군부가 본인들의 존재감을 계속해서 유지하기 위해 영국이 사용했던 소수민족 간 갈등을 부추겨 서로 분열하도록 하는 정책을 펼쳤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계속해서 내전이 끝나지 않고 소수민족과의 내전이 계속되면서 다수의 국민들은 군부가 필요한 상황이었고 권력과 경제권까지 비례해서 군부가 강해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 되었던 것입니다. 

미얀마 정부는 내란을 안정시키기 위해 독립직후부터 군에 많은 예산을 투자했으며 미얀마의 젊은 엘리트층들이 군에 몰려들기 시작했고 예산과 인재의 집중이 결국 미얀마 군부를 무소불위의 존재로 만드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미얀마 군부가 막강한 권력을 갖게 된 것은 모든 경제력을 군에서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은행, 통신, 연예, 관광, 담배, 마트 등 돈이 되는 모든 통제권은 군인들이 통제하고 있고 군인들이 막대한 부를 쌓고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사업들로 축적한 돈을 바탕으로 군과 경제, 언론, 사법권까지 모든 기득권들을 똘똘 뭉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미얀마의 군이 상원과 하원 모두 25% 정원을 구성하고 있어 헌법 개정을 위해 75%의 찬성이 있어야 하는데 군의 동의 없이는 헌법개정은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군은 대통령 후보 3인 중 한 명을 추천할 수 있고 국방, 내무, 국경개발 등 3개 부처의 장관직을 모두 군인인 맡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미얀마의 군통수권자는 선출된 대통령이 아니고 참모총장이 갖고 있으며 참모총장도 군 스스로 선출하고 있는 구조입니다. 군은 언제든 합법적으로 의회를 해산할 권리가 있고 미얀마의 선출된 대통령은 실권이 없는 허수아비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2021년 군사쿠데타도 명분은 아웅산 수치 여사이끄는 당에서 부정선거가 있었다는 것이었지만 수치여사가 이끄는 집권 여당이 군부의 특권을 줄이려는 법안을 통과시켜려 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이렇듯 미얀마의 군부는 1980년 대한민국의 군부와는 상황도 다르고 차원도 다르다는 것입니다. 국민들의 투쟁만으로는 민주화의 기적을 만들어낼 수 없는 구조이며 수천 명의 시민들을 희생하더라도 군부의 안위를 지키면 된다는 군부를 비롯한 다수의 이해관계 집단이 상당히 견고하게 연결되어 있어 시민들의 저항운동만으로는 구조적으로 해결이 안 되는 구조라는 것입니다. 

 

미얀마의 민주화는 산 넘어 산

미얀마의 군부독재를 종식시키고 민주화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묘책이 나와야 가능하다고 할 정도로 매우 어려운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국민들의 저항과 국제사회의 도움으로 민주정부가 수립되더라도 헌법을 개정하는 문제군부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는 이권 카르텔의 고리를 끊어내는 것 또한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입니다. 

소수민족 또한 전 수치여사의 정부를 신뢰하지 못했고 버마족에 대한 신뢰가 없으며 과거 팔롱협약에 의해 독립을 해야 한다는 인식이 강하기 때문에 내전은 끊이지 않을 것이며 내전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군부의 힘이 필요한 상황으로 군부 중심의 국가운영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인 구조이기도 합니다. 

미얀마가 영국으로부터 독립 후 7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군부독재를 끊어내지 못하는 것버마족과 소수민족 간 갈등을 계속해서 부추겨서 내전일 발생하도록 상황을 만들고 있으며 내전에 대비하는 군은 계속해서 이를 안정화시키기 위한 활동이 필요하고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질 수 없는 상황이기도 한 것입니다. 

미얀마의 민주화는 단순하게 군부세력만을 축출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며 버마족과 소수민족 간 갈등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의 문제 해결이 동시에 있어야만 가능한 상황으로 구조적으로나 물리적으로 해결책이 없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맺음말

2021년 미얀마에서 군사 쿠데타가 발생해서 수십만 명이 넘는 인원의 난민이 발생했고 수천 명이 넘는 시민들이 희생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국제사회의 무관심으로 미얀마 내 군부는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무소불위의 권력이 되었습니다. 

끊이지 않는 민족 간 내전으로 국민들의 피해는 계속해서 늘어나고 이를 안정화시키기 위해 국민들은 군인들을 필요로 하며 군인들은 국민들의 필요성을 이용해서 정권을 장악하는 역사가 반복되고 있는 것이 미얀마의 현재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얀마에서 이러한 비극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군사정권의 종식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소수민족에 대한 갈등을 해소하는 대책도 병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랜 역사동안 소수민족과의 갈등으로 내전이 발생하고 내전을 통해 권력을 키워온 군부는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것에 대해서 당연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오랜 기간 동안 미얀마의 최고 엘리트들이 군의 핵심계층을 두텁게 형성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일부 국민들과 정치인들조차도 이들이 국가를 운영하는 것에 대해서 당연한 모습인 양 인식하고 있는 것도 미얀마의 민주화를 더 어렵게 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현재까지도 한국은 물론 전 세계 곳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미얀마인들은 미얀마의 민주화를 위해 활동하고 있으며 미얀마 내 많은 국민들이 민주화 운동을 하면서 희생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국민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 군은 권력을 지키기 위해 국민들을 죽이고 있고 소수민족의 내전을 부추기며 국가의 안전을 위해서는 군이 필요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 또한 근절시켜야 하는데 이것은 국제사회의 중재와 역할이 있어야 가능한 상황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민주정권을 수립하고 소수민족이 무장을 해제하고 소수민족의 자치권을 법적으로 보장해 주고 중앙정부에 대한 소수민족의 중용 등 대내외적으로 변화를 보이지 않으면 미얀마의 민주화는 오늘도 내일도 진행형이 계속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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