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사상식 및 사회문제

왜 교황청 근위대는 스위스 용병이어야만 하는가?

by 이슈 분석 2023. 6. 1.

썸네일

중세 유럽에서 전쟁 시 스위스 용병이 어느 편에 서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되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런 스위스 용병이 어떻게 오늘날까지 교황청의 근위대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함께 보면 좋은 글》

 

왜 구르카 용병을 세계 최고의 용병이라고 하는가?

프랑스 외인부대, 미국의 블랙워터, 러시아의 바그너, 바티칸 스위스 용병, 네팔의 구르카 용병 등 세계적으로 많은 용병들이 활동하고 있는데요, 이 중에서 구르카 용병은 세계에서 최고의 용

issuegabber.tistory.com

 

 

러시아의 용병업체 바그너 그룹 알아보기

세계 3대 용병을 꼽으라고 한다면 스위스 용병, 네팔의 구르카 용병, 프랑스의 외인부대 정도를 꼽는데 이들과 달리 음지에서 러시아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부를 축적하고 있는 바그너 용병이

issuegabber.tistory.com

 

스위스 용병 등장 배경

스위스는 알프스 산맥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산악지대로 인해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척박한 지형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자연적인 환경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다른 수단으로 돈을 벌어야 했고, 방안을 찾다가 국가 차원에서 용병 산업을 키우기로 결심했습니다.

스위스 정부는 용병활동을 조직화하고 통제함으로써 전 세계에서 최초로 용병 비즈니스를 육성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스위스는 척박한 땅에서 돈을 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용병을 키우기 시작한 것입니다. 

중세 시대에 스위스는 농업이나 상업 등 인프라 구조를 갖추지 못했고 유일한 자원이 인적자원이었고 국가차원에서 용병을 산업으로 발전시키기 전부터 전쟁에 용병으로 참가하여 가족의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스위스 용병들은 자신들의 평판이 손상될 경우 다음 계약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 되고 다른 스위스 용병들에게도 악영향을 줄 수 있었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싸웠다고 합니다.

이러한 전통이 누적되면서 중세 유럽 전쟁의 승패는 스위스 용병에게 달려있을 정도로 전쟁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역사적으로 스위스는 14세기부터 19세기까지 유럽에 200만 명 이상의 용병을 제공했습니다. 스위스 용병은 다른 용병과는 달리 계약 주체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과 부대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정신으로 유명해지면서 전쟁 시장에서 필요로 했으며 오랫동안 유럽에서 가장 강한 용병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습니다.

 

스위스 용병의 주요 전투사

1. 모르가르텐 전투

모르가르텐 전투는 1315년 오스트리아 기사단 2천여 명을 포함한 9천여 명의 대군1300명이 스위스 용병이 격돌한 전투스위스 용병이 압승을 거두었는데 역사상 보병이 기사를 제압한 최초의 전투로 기록되었습니다.

2. 프랑스 대혁명 시 튈르리궁 전투

프랑스 루이 16세는 프랑스 전체 병력 30만 명 중 12만 명을 스위스 용병으로 구성했습니다. 프랑스 대혁명 당시 분노한 파리 군중들이 루이 16세가 머물던 튈르리궁을 공격하자 프랑스인 근위대는 모두 도망을 갔으나 끝까지 루이 16세를 지킨 것은 스위스 근위대였습니다.

파리 시민들은 스위스 근위대에 나쁜 감정이 없었고 루이 16세도 스위스 근위대원들에게 조국으로 돌아가라고 했으나 스위스 근위대원들은 끝까지 루이 16세를 지켰으며 결국 모두 전사하였습니다.

튈르리궁에서 죽은 스위스 근위대의 숫자는 786명이었고 프랑스 대혁명 당시 전사한 스위스 용병들을 기리기 위해 1792년 8월 19일 스위스 루체른에 '빈사의 사자상'을 만들었다고 하며 오늘날 스위스 주요 관광코스로 인기가 있는 곳입니다. 

 

로마 교황청의 스위스 용병 고용 배경

1. 로마 교황청의 스위스 용병 고용

1505년 6월 교황 율리우스 2세 유럽의 여러 나라들의 전쟁으로 인해 혼란스러웠던 상황 속에서 교황청을 지키기 위해 스위스 용병을 처음으로 고용했는데 이것이 바티칸을 지키는 군대인 교황청 스위스 근위대의 시작이었습니다. 

2. 스위스 근위대가 교황청의 신임을 받은 계기

1527년에 벌어진 신성로마제국의 왕이었던 카를 5세의 군대가 교황이 있었던 로마를 침략한 '사코 디 로마' 전투가 있었고 당시 카를 5세의 군대 위세가 대단했기에 교황청에서 고용한 다른 유럽국가들의 용병들은 모두 도망쳤지만 189명의 스위스 근위병들만이 남아 교황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당시 교황이었던 클레멘스 7세는 스위스 근위대에게 조국으로 돌아갈 것을 권고했지만 이들은 끝까지 남겠다는 맹세를 지켜야 한다면서 교황의 권고를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1527년 5월 6일 스위스 근위대는 카를 5세 군대와 싸우게 되었고 189명의 스위스 근위병들 중 42명은 교황을 무사히 대피시키기 위해 교황청을 떠났고 나머지 147명은 카를 5세 군대와 싸우다가 모두 전사하였습니다.

무사히 대피한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스위스 근위대의 희생에 감동했으며 앞으로 교황청은 오직 스위스 근위대만 고용해야 한다고 못을 박았습니다. 이때를 기점으로 스위스 근위대가 바티칸의 교황청을 지키는 전통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3. 기타 스위스 근위대 활동

1798년 나폴레옹의 군대가 로마를 침략했을 때 당시 교황이었던 비오 6세를 위해 용맹하게 싸우다 대부분 전사했으며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히틀러가 로마에 진격했을 때도 독일군의 바티칸 진입을 막아낸 것도 스위스 근위대였습니다.

이렇게 스위스 근위대는 교황청 수호의 상징처럼 되었으며 지금까지 전통이 이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스위스도 19세기부터 용병을 불법으로 규정했고 현재 바티칸 스위스 근위대는 용병이라는 표현을 하지 않고 치안경찰로 분류되어 관리하고 있습니다.

 

맺음말

교황청을 지키는 스위스 근위대는 아직까지도 스위스인들에게 자랑스러운 역사와 자부심으로 자리 잡고 있어 매년 스위스 근위대 선발에 많은 젊은이들이 지원하고 있습니다.

비록 스위스 근위대의 봉급이 스위스 국민들의 평균 소득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스위스 근위대의 전설을 동경하는 젊은 지원자들이 매년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발된 인원들은 교황에 대한 충성을 서약하는 충성 서약식을 거치게 되고 이 충성 서약식은 1527년 스위스 근위대원 147명이 클레맨스 교황을 호위하다가 목숨을 잃은 날을 기리기 위해 매년 5월 6일 바티칸에서 거행되고 있습니다. 

스위스 용병의 브랜드를 지켜내기 위해 처절한 사투를 벌였고 용병임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바쳐가며 신의를 다했던 스위스 용병의 무구한 역사가 빛을 발해 현재 교황청 근위대를 독점하는 국가가 되었으며 왜 교황청이 근위대를 스위스인만 고집하는지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