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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정세 및 분쟁

유대인의 이스라엘 국가 재건 역사 알아보기

by 이슈 분석 2023. 9. 21.

유대인의 이스라엘 국가 재건 역사

A.D 70년 로마의 티투스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멸망하면서 유대인들은 전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다가 1948년 지금의 중동 땅에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재건했는데요 유대인의 이스라엘 국가재건 역사를 알아보겠습니다.

 

유대인의 이스라엘 국가재건 역사

4천여 년 전 유대민족의 지도자였던 아브라함은 지금의 이라크 남부 지역에서 살다가 신의 말씀에 따라 "가나안(팔레스타인 의미)"이라고 불리는 팔레스타인 땅으로 이주를 하면서 유대인들과 중동국가들 간 분쟁의 씨앗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이미 블레셋인들이 정착해서 살고 있었고 훗날 유대민족과 블레셋인 간 충돌의 뿌리가 깊게 박힌 땅이 되는 시작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 이후 야곱 시대에 와서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 흉년이 들었고 살기 어려워지자 야곱은 유대민족을 이끌고 이집트로 이주를 했습니다.

 

모세의 등장과 유대민족의 재집결과 유랑생활

유대민족의 이집트 정착을 견제한 이집트는 유대인들을 노예로 전락시켰고 약 400년간 유대인들은 비참한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모세라는 사람이 등장하여 박해받던 유대민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하면서 선조들이 살았던 원래 땅인 가나안(팔레스타인)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이미 블레셋인이 정착하고 있어서 쉽지 않았으며 이때부터 가나안 땅을 두고 유대인과 블레셋인 간 충돌이 시작되었습니다.

모세 시절에는 가나안 땅을 되찾지 못했지만 모세의 계승자인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데 성공합니다.

기원전 약 1000년 경 유대인들은 초대왕 사울이 등장해서 이스라엘을 건국했고 이후 다윗왕은 예루살렘을 수도로 지정했으며 이후 솔로몬왕이 예루살렘 성전을 건설하면서 유대인들의 왕국 이스라엘은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분열되었습니다.

이후 북쪽의 이스라엘은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되어 포로로 끌려갔는데 오늘날까지도 어디로 갔는지 흔적이 밝혀지지 않고 있고 남쪽의 유다 왕국도 기원전 586년 바빌로니아에 의해 멸망 후 포로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기원전 63년 로마가 이스라엘지역도 점령했고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은 두 차례에 걸쳐 로마에 저항하며 독립전쟁을 했지만 기원전 66년에서 70년간 있었던 제1차 유대 독립전쟁에서 패했으며 이때 화가 난 로마황제는 예루살렘의 성전을 파괴하고 유일하게 성전 서쪽 벽만 남겼는데 그곳을 "통곡의 벽"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성전을 잃은 유대인들의 슬픔이 담겨 있다고 해서 통곡의 벽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런데 132년에서부터 134년까지 유대인들은 다시 반란을 일으키는데 화가 난 로마제국은 예루살렘의 이름도 바꿔버리고 유대인들을 전부 쫓아냈고 수 백 년간 로마가 예루살렘 지역을 지배하고 있다가 기원전 7세기경 이슬람 세력이 점령하게 됩니다.

오스만제국의 지배하에서 팔레스타인 땅에서 아랍인들이 살게 한 것이며 이때부터 유대인들의 슬픈 유랑 생활은 시작되었습니다.

유대민족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강제로 끌려가서 만들어진 살아가는 공동체인 디아스포라가 세워지는데 디아스포라는 특정 사람들이 기존에 살던 땅을 떠나 다른 지역에서 공동체를 이루어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디아스포라는 팔레스타인을 떠나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며 유대교의 규범과 관습을 유지하는 유대인의 공동체에서 비롯된 단어입니다.

뿔뿔이 흩어진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건너간 곳은 세파르딤이라 불리는 스페인으로 많이 갔으며 유럽에 정착한 "아슈케나짐"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런데 유럽인들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였다고 생각해서 유럽 전체적으로 기독교를 믿기 때문에 유대인들을 안 좋아했고 그들을 적대시하였습니다.

기독교는 하느님의 본성을 지닌 세 위격(성부, 성자, 성령)으로 존재한다는 삼위일체 교리를 따르나 유대교는 예수에게 신성모독의 죄를 씌워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기독교를 믿는 유럽에서 차별과 핍박을 당한 유대인들은 악의적인 소문에 휩쓸리기 시작하는데 유대인들이 아이들을 잡아먹고 흑사병을 유대인이 퍼트렸다는 소문들까지 돌게 되는 등 나쁜 일은 무조건 유대인의 탓으로 돌리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습니다.

나라 없이 떠도는 유대인은 유럽사회에서 약자일 수밖에 없었고 공격을 당해도 인간 취급을 받지 못했던 유대인의 삶이었습니다.

박해를 피해 유럽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은 또다시 이주를 준비했고 그곳이 러시아와 동유럽이었는데요 19세기말 이 지역 유대인이 전 세계 유대인의 80%에 육박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1881년 러시아에서 혁명가들이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로 2세를 암살하는데 황제 암살 사건이 유대인이 아님에도 유대인이 관여했다는 소문이 돌면서 유대인에 대한 조직적인 탄압과 학살이 시작되었습니다.

1880년 초에 시작한 유대인 탄압 포그롬이 무려 40년간 계속되었고 약 15만 명 이상의 유대인이 학살당했습니다.

또한 1894년 프랑스에서 유대인들을 절망시킨 사건이 발생하는데 프랑스군 유대인장교가 군사재판에서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군사재판에서 억울하게 중형을 선고받습니다.

이것이 유대인의 나라 이스라엘 건국의 불씨가 된 드레퓌스 사건입니다.

파리주재 독일대사관에 들어간 프랑스 군사기밀문서를 프랑스의 누군가가 팔아넘긴 것인데 이것을 당시 프랑스 정보국에 근무했던 유대인 장교 드레퓌스를 스파이로 지목했고 간첩혐의로 체포했으며 당시 프랑스 최고형인 종신유배형을 내렸습니다.

드레퓌스 사건을 취재한 유대인 기자인 헤르츨은 프랑스처럼 계몽된 나라에서 유대인이 이렇게 차별을 받는다면 세계 어디에서도 유대인들은 안전한 곳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1896년 "유대국가"라는 책을 집필합니다.

 

이스라엘 국가탄생

"유대국가"라는 책을 집필한 헤르츨은 조상들이 살던 이스라엘 땅에 유대인들의 국가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테오도르 헤르츨이 '나탄 브르바움'의 '시온주의'라는 개념을 최초로 실행하는데요 시온은 예루살렘 성지의 언덕을 의미합니다.

시온주의의 핵심은 유대인들이 조상이 살던 땅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국가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헤르츨은 자신의 생각을 속전속결로 실행에 옮겼으며 1897년 각국 유대인들을 규합하기 시작했고 스위스 바젤에서 3일간 일정으로 제1회 시온주의자 총회를 개최합니다.

헤르츨은 이스라엘 국기와 애국가까지 만들면서 유대인 국가 건설을 선언하면서 현대판 '모세'로 칭송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팔레스타인 땅은 이미 아랍사람들이 정착해서 살고 있었고 유대인들이 대거 들어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국가를 건설하겠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던 유대인들이 팔페스타인 땅을 사들이기 시작합니다.

돈 많은 유대인들이 개인적으로도 샀지만 1901년 '유대민족기금'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돈을 모금하고 전 세계 유대인들이 매년 수백만 달러를 기부해서 팔레스타인 지주들에게서 땅을 매입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구매한 땅에 유대인 정착촌을 만들기 시작한 시온주의자들은 현재 이스라엘의 수도 텔아비브에 대규모 정착촌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1914년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연합국과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만튀르크의 동맹국 간 1차 세계대전이 발생합니다.

영국중심의 연합국은 오스만튀르크가 갖고 있는 중동 땅을 차지하려는 욕심들이 있었고 영국은 전쟁을 이기기 위한 온갖 전략을 쓰는데 상대국들이 만만치 않은 국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스만 제국이 임명한 아랍의 지도자로 메카 지역의 아랍지도자 샤리프 후세인이 영국령 이집트의 최고 책임자였던 헨리 맥마흔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후세인-맥마흔 서한은 10통이 오갔고 내용의 핵심은 영국이 전쟁에서 이기면 아랍 민족의 국가를 세워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약속만 해주면 아랍인들이 영국과 함께 오스만과 싸우겠다느 것이었습니다.

영국은 후세인의 제의를 받아들였고 후세인은 아랍민족을 규합해서 1916년 6월부터 오스만제국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오스만 제국에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문제는 영국이 독일과 오스트라와의 전쟁에서 고전했으며 전쟁 자금도 바닥이 나기 시작하면서 유대인 시온주의자들에게 유대인을 위한 국가를 중동지역에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하면서 전쟁 자금을 받기로 한 것입니다.

또한 연합국은 전쟁이 끝나면 시리아 지역은 프랑스 보호령, 이라크와 팔레스타인은 영국 보호령으로 분할하기 했습니다.

팔레스타인을 차지한 영국은 아랍인들과의 약속도 지켜야 하고 유대인들과의 약속도 지켜야 하는 상황이 되었고 결국 유대인들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영국은 팔레스타인 땅을 통치할 총책임자로 유대인 시온주의자인 하버트 사무엘을 고등판무관으로 임명했습니다.

팔레스타인 땅으로 유대인들이 점점 증가하면서 기존의 팔레스타인인들이 불안함을 느끼기 시작했고 기존에 팔레스타인 거주 지역에 유대인이 3%인 13000명 정도 살고 있었는데 1930년 후반에는 약 40만 명까지 증가했고 팔레스타인 전체 인구의 1/3을 차지했습니다.

1930년대 히틀러 집권 후 유럽 전역에서 유대인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자 유럽 전역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팔레스타인이 폭발하기 시작했으며 참다못해 1936년 팔레스타인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3년간 지속되었습니다.

3년간의 반란을 통해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 사이에서 민족주의가 피어나기 시작했고 반란을 중지하는 조건으로 영국정부에 팔레스타인 독립과 유대인의 이민을 금지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영국은 팔레스타인 요구를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하고 10년 내 팔레스타인 국가를 만들어주겠다고 약속을 했으며 전세가 역전된 극렬 유대인 들인들이 영국에 대한 테러를 일으켰는데 1946년 킹 데이비드 호텔에 대한 공격이었고 킹 데이비드 호텔은 영국의 행정 및 군사 본부가 있던 건물입니다.

어느 편도 들어주기 힘들었던 영국은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사이에서 발을 빼기 시작했고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하면서 세계 최강자로 등장하면서 미국이 개입하기 시작하며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해결이 안 돼서 결국 UN으로 모든 문제를 넘겼습니다.

1947년 11월 UN 총회에서 유대인에게 영토를 줄 것인가에 대한 투표에서 팔레스타인과 유대인 영토 분할이 결정되었고 팔레스타인 분할 안 통과로 유대인은 팔레스타인 땅에 국가를 수립할 수 있는 공식적인 허가서를 받게 되었습니다.

UN에서 분할 안이 통과된 후 팔레스타인 땅은 94%에서 50% 이하로 줄어들었고 팔레스타인들은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싸움이 시작됐습니다.

그런데 영국이 팔레스타인지역에서 영국군을 철수했고 원래 갖고 있던 땅을 되찾으려는 아랍인과 어렵게 찾은 땅을 지키려는 유대인간 충돌은 심화된 것입니다.

이렇게 혼란한 상황에서 1948년 5월 14일 초대 총리 벤구리온이 독립국가 선포식을 했고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나라 이스라엘 건국을 선포합니다.

국가를 수립한 이스라엘은 텔아비브를 수도로 삼고 UN 분할 안에 따라 예루살렘은 UN이 관할하는 국제공동 구역이 돼서 충돌의 불씨로 계속 남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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