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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상식 및 사회문제

스위스는 어떻게 부자 나라가 되었는가?

by 이슈 분석 2023. 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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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가난해서 정부에서 조차도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용병사업을 국가 주요 사업으로 추진했던 스위스가 어떻게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국가가 되었을까요? 스위스가 어떻게 부자 나라가 되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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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의 근세시대 특징

스위스는 아름다운 알프스 산맥으로 둘러싸인 국가로 전 국토의 70%가 산악지대이며 호수까지 합치면 75% 정도는 농작물을 경작할 수 없는 땅이라고 합니다. 

경작이 가능한 토지가 25%뿐인데 이마저도 고지대 특성상 일교차와 냉해가 심하여 농사를 짓는 것은 어렵다고 합니다. 

산업혁명 이전 농경사회에서 농사를 지을 수 없다는 것은 생계를 고민해야 하는 심각한 일이며 스위스는 이러한 지형적 특성 때문에 오랫동안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로 인식되었습니다. 

산업혁명이 본격화되기 전인 19세기 이전까지 스위스는 정부가 주도해서 건장한 남자들을 해외로 보내서 돈을 벌도록 했으며 해외 일자리 중 가장 안정적 수입원이 되었던 것이 용병이었습니다. 

 

국가는 가난했지만 스위스 국민들은 용병으로 유럽전역에서 용맹함을 인정받았고 스위스 용병을 얼마나 갖고 있느냐에 따라 전쟁의 승패가 결정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전쟁터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습니다. 

스위스 국민들은 대부분 험준한 산악지대에서 살았기 때문에 선천적으로 폐활량이 뛰어났고 체력도 우수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국경을 맞대고 있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과 잦은 전투를 통해 실전 경험도 풍부해서 유럽에서 최고의 용병으로 명성을 쌓았던 것입니다. 

유럽에서 스위스 용병들의 몸값이 가장 비쌌지만 모든 왕가가 급할 때면 스위스 용병을 찾을 정도로 이들에 대한 신뢰도는 매우 높았습니다. 

백년전쟁, 스페인·폴란드·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 나폴레옹 전쟁 등 유럽의 주요 전쟁에는 항상 스위스 용병들이 활약했습니다. 로마 교황의 바티칸도 수백 년 전부터 현재까지 교황청 근위병은 스위스를 고집하는 것도 역사적으로 신뢰성을 인정받았기 때문입니다. 스위스 용병의 특징은 절대로 고용주를 배신하지 않으며 고용주를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바쳐 싸운 역사가 이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프랑스혁명당시 루이 16세를 지키기 위해 튈르리궁을 지키던 스위스 용병 700여 명이 살아서 고향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자신의 고용주인 루이 16세를 지키기 위해 죽을 때까지 싸운 것을 보면 이들이 계약을 지키기 위해서는 목숨도 내어놓았던 것입니다. 스위스인들은 유럽사회에서 오랜 기간 동안 신뢰를 쌓아 온 것이고 결국 이러한 신뢰가 스위스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스위스가 부자나라가 될 수 있었던 3가지 요소

가. '신뢰'라는 스위스 브랜드가 만들어짐

근세시대 잦은 권력투쟁과 국가 간 전쟁에서 스위스인들은 용병으로 참전하여 신뢰를 쌓아왔으며 유럽 전역에서 스위스인 하면 '믿음, 신뢰'라는 단어가 떠올릴 정도로 스위스인에 대한 평가는 매우 좋았습니다. 결국 이렇게 역사를 통해 오랫동안 쌓아 온 스위스인에 대한 신뢰가 스위스가 발전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입니다. 

스위스인에 대한 신뢰는 스위스 국가에 대한 신뢰로 확산되었고 스위스라는 국가 자체가 브랜드가 되어 스위스에서 생산하는 모든 제품에 대한 신뢰가 높아지는 현상이 만들어졌으며 결국 스위스산 제품은 그것이 무엇이든 믿고 쓸 수 있는 것으로 자라 잡았던 것입니다.

나. 스위스 용병은 '고가'라도 쓴다는 인식 확산

근대와 근세를 통해 쌓아 온 스위스 용병에 대한 신뢰는 그들의 몸값을 천정부지로 올렸으며 아무리 많은 돈을 치르더라도 스위스 용병을 쓰려는 움직임이 강하게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향후 스위스가 제조업이 성장하면서 스위스에서 만들어진 제품은 고가이고 믿을 수 있는 제품이라는 인식을 만들어줬으며 결국 오랜 기간 용병을 통해 쌓아 온 고가 이미지가 국가 전체 이미지로 연결되어 스위스가 만들면 당연히 고가라는 인식이 굳어졌던 것이며 스위스가 고부가가치 상품을 만드는 상징적인 국가가 되었던 것입니다.

다. 중립국 지위 획득

지리적으로 스위스는 유럽의 중앙에 위치한 교통의 요지로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등 강대국들과 국경을 맞대고 있습니다. 이러한 지형적 특징 때문에 스위스는 강대국들의 전쟁터가 되었고 이 때문에 오래전부터 생존을 위해 중립국을 추진해 왔으며 결국 19세기 초가 되어서야 빈회의를 통해 국제적으로 중립국 지위를 인정받았습니다.

 

중립국 지위를 인정받으면서 용병산업은 완전히 중단하게 되면서 다른 산업을 찾아야 했고 다른 산업을 찾으면서 스위스가 부국이 되는데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립국이 되지 않았다면 아직도 용병산업이나 다른 나라에 가서 돈벌이로 생계를 유지하는 일을 계속했을 수도 있는데 중립국 지위를 얻음과 동시에 용병사업을 중단하고 다른 먹거리를 찾는 과정 속에서 스위스는 고속성장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스위스가 고부가가치 산업 국가로 발전한 계기

가. 프랑스 신교도들의 스위스 이주

16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구교와 신교 간의 종교전쟁인 위그노 전쟁이 발생했고 많은 프랑스 신교도들이 박해를 피해 스위스로 이주했으며 스위스는 칼뱅츠빙글리의 종교개혁으로 신교가 굳건했던 국가였습니다. 이때 넘어온 신교도인들 중 당대 최고의 기술을 가진 시계공들이 유독 많았다고 하며 이 시기 스위스엔 보석 세공업 같은 수공업이 발달했는데 검소한 삶을 강조하는 종교개혁 분위기로 보석 세공업자들 상당수가 시계사업으로 업종을 전환했습니다. 이들은 프랑스 장인들에게 시계 제작 기술을 배웠으며 보석 세공업자 특유의 정밀함이 더해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품질의 뛰어난 시계들을 만들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스위스는 인구가 적어 무역만이 살 수 있는 길이었는데 시계는 부피나 무게가 적어 운송이 편리했으며 좁고 험난한 산길이 많은 스위스에 적합한 제품이었던 것입니다. 스위스 용병의 몸값이 아주 비쌌지만 모든 왕가에서는 스위시인들을 찾은 것처럼 스위스 시계는 고가였음에도 불구하고 높은 품질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높았습니다.

이렇게 부가가치가 높은 비싼 제품을 팔겠다는 기조는 오늘날까지도 이어오고 있습니다. 시계는 작고 가벼울 뿐만 아니라 스위스인이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신뢰가 높았고 용병으로서 고가로 활동했던 스위스인들에 대한 인식도 고가라는 것이 박혀 있어 시계 또한 고가로 판매되었던 것입니다.

스위스 상인들은 큰 가방에 시계를 가득 담아 알프스 산맥을 넘어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에서 시계를 팔아서 큰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스위스는 용병이 아니더라도 먹고살 수 있는 첫 번째 산업이 탄생했던 것입니다.

나. 염색업이 제약산업을 일으키다

스위스의 제약산업이 염색업에서 출발했다고 하면 의아해하실 수도 있는데  처음에 염색업은 알프스에서 나는 여러 식물을 이용해서 각가지 색을 물들이던 단순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다 스위스인들은 산자락에서 채취한 여러 가지 염색용 식물들 중에서 진귀한 약초가 산더미처럼 많다는 걸 알기 시작했고 연구를 거듭한 끝에 약초를 알약으로 만들어 유럽 전역에 팔기 시작했습니다. 약초는 시계보다 가벼웠고 부가가치도 높아서 가방 하나만으로도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제약산업이 이렇게 태동하면서 오늘날 스위스는 세계 신약발매 1위 기업인 노바티스, 항암치료제 세계 1위인 로슈 같은 세계적인 제약회사를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 세계 최초의 디젤엔진 방적기 제작

스위스가 유럽에서 가장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국가에서 산업사회로 탈바꿈시켜 준 것 두 가지는 시계와 섬유산업입니다. 18세기 후반 영국에서 방적기가 들여오면서 스위스는 본격적으로 섬유산업을 시작했고 영국에서 들여온 방적기에 디젤엔진을 단 방적기를 최초로 개발하여 대량생산이 가능하게 되면서 1900년대까지만 해도 전 국민의 50% 이상이 섬유산업에 종사할 정도로 스위스에서 섬유산업의 비중은 매우 높았습니다.

또한 스위스에서 만든 디젤 엔진을 단 방적기는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면서 엄청난 부를 쌓기도 했습니다. 스위스가 섬유산업이 발전하는데 또한 용병 출신들의 역할이 컸습니다. 유럽 각지에서 용병으로 파견된 경험을 통해 각국의 시장 사정에 밝았고 이들을 신뢰하는 인맥들도 많아 쉽게 판로 개척이 가능했다고 합니다. 

 

라. 인프라 구축을 통한 관광산업 활성화

스위스가 약소국이었을 때는 스위스의 지리적 위치는 강대국들의 침략대상이었지만 무역이 발달하면서 스위스는 교통의 요지로 부각되었습니다. 스위스는 알프스 너머의 국가들과의 교역을 늘리기 위해 19세기 초부터 도로건설에 주력했고 19세기 중반에는 철도망도 대폭 늘렸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국가 도로망 구축이 스위스에게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산업의 기회를 제공했는데 그것이 바로 관광업이었습니다. 오늘날까지 스위스 경제에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관광산업은 도로망의 구축을 통해 접근성이 좋아지면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마. 금융산업의 중심지

시계와 섬유, 관광과 제약산업 등을 통해 안정적으로 자본을 축적한 스위스는 금융업 발전을 가져오기 시작했고 결국 은행사업의 성공이 최빈국 스위스를 일약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국가로 만들어준 계기가 되었습니다. 

스위스 금융업도 프랑스 위그노들이 이주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스위스로 건너온 위그노들은 신흥재력가들이 많았고 주로 제네바에서 고리대금업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자신들을 내쫓은 루이 16세가 스위스로 건너간 고리대금업을 하는 위그노들에게 돈을 빌렸는데 이러한 사실을 비밀로 해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자신이 내쫓은 사람들에게 손을 내민 것이 창피했기 때문입니다. 스위스 은행 하면 예금주와 돈의 출처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비밀주의로 유명한데 이것이 바로 루이 16세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시작된 스위스의 금융업은 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세계적인 수준으로 올라서게 되는데 이것은 스위스가 중립국이었던 점과 스위스라면 자신들의 돈을 끝까지 지켜줄 것이란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쟁이 날 때마다 유럽의 부자들은 자신들의 돈을 지켜줄 안전한 나라를 찾기 시작했는데 독일과 영국은 믿을 수가 없었으며 역사적으로 용병시절부터 신뢰가 높았던 스위스를 찾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전쟁에서 반드시 필요한 제품인 석유의 주요 공급 국가들인 중동에서도 결제수단으로 스위스 프랑을 요구했다고 합니다. 허구한 날 침략을 당하고 용병 외엔 먹고 살길이 없던 이 가난한 국가의 돈이 일약 기축통화까지 된 것입니다. 

스위스 은행에 돈을 맞긴 유럽의 부자들은 나치의 비밀경찰 게슈타포가 부자들이 맡긴 돈을 찾으려고 했지만 스위스 은행은 끝까지 지켜주었으며 결과적으로 금융산업 분야에서는 경쟁국이 없을 정도로 발전했고 스위스의 경제를 반석 위에 올려놓는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바. 국제기구들의 메카로 태어난 스위스

2차 세계대전을 통해 전쟁의 리스크가 적고 안전하다고 인식이 부각되면서 수많은 국제기구들이 스위스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세계무역기구(WTO), 국제적십자사(IRCRCM), 세보건기구(WHO), 국제노동기구(ILO), 국제결제은행(BIS) 등 30여 개의 주요 국제기구와 250여 개의 NGO 단체가 스위스에 양질의 일자리를 지금도 제공하고 있습니다. 또한 국제올림픽위원회(IOC)국제축구연맹(FIFA)도 스위스에 본부가 있습니다. 

민간기업들도 구글의 해외기술센터를 포함한 5천여 개의 다국적기업이 스위스에 소재지를 두고 있어 이 나라의 부를 더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맺음말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스위스가 부자 국가가 될 수 있었던 기저에는 용병활동 간 보인 신뢰가 깔려있다는 것과 영세중립국이 되면서 오랜 세월 전쟁을 피한 덕에 지속적으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스위스 산업 흐름의 공통점은 역량의 집중입니다. 인구 900만 명도 안되고 영토는 남한의 40% 밖에 되지 않는 작은 나라가 모든 산업을 골고루 발전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특정분야의 산업에 올인할 수밖에 없었는데 시계, 제약, 섬유, 관광, 금융 등 5개 분야에 집중했던 것입니다. 

특정 산업의 수준을 세계 최고로 끌어올려 최대한 비싸게 파는 것, 이것이 스위스가 지금까지 수백 년 동안 반복해 온 전략인 것입니다. 

최근에는 최첨단 산업에 집중하고 있으며 스위스 젊은이들의 15%만 대학을 진학하고 대부분은 직업학교에 가는데 이들 또한 대부분은 이공계라고 합니다. 시계에서 시작한 정밀기술을 기반으로 의료기기, 선박터빈, 정밀측정기는 물론 항공우주분야까지 최첨단 제품을 만들어 내고 있고 세계에서 최고 수준의 품질로 인정받으면서 고부가가치 산업의 선두주자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스위스는 가장 가난한 국가에서 오늘날 1인당 국민소득이 8만 달러가 넘는 세계 최고의 부자나라가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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